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 1

최근에 열화당에서 번역하고 출판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를 다 읽었다. 책은 저번 학기 쯤에 사놨건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Dine LA 기간 중 하루는 이 책을 들고 나갔더니 그 날 다 읽어버렸다. (Dine LA 는 엘에이 관광청에서 주최하는 2주간의 레스토랑 투어인데, 시민들 그리고 관광객들은 2주동안 엘에이의 다양한 레스토랑들이 시그니처 메뉴 혹은 코스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한 챕터당 내용도 적으며 심지어 그 중 절반은 미술 작품이다보니 읽는건 술술 잘 읽히는데, 읽고 나서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다른 사람들과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혹자는 Ways of Seeing 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라고 번역한 것에 약간의 불만을 드러낸 반면 나는 역자가 나름대로 좋은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을 읽을 당시에는 (제목 때문에 생긴) 첫인상이나 내가 알고자 하는 내용과 조금 달라서 계속 회의감을 가지고 책을 읽었지만, 읽고 나서는 왜 이렇게 제목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 사실 이 책은 미술에 대해 관심을 상대적으로 덜 가진 대중을 타겟으로 한 안내서에 가까운 책이어서,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신선하거나 놀랍지는 않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난무하는 현대 예술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 책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 라는 제목이 가져다주는 기대감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뭐가 다르게 본다는거야?”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이 책의 제목은 시대적 맥락을 통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저자가 대중을 상대로 TV강연을 하고 책을 쓴 그 시대에 대다수의 시민들은 예술을 잘 몰랐을뿐더러 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부르주아 계층 조차도 학계의 주류 예술사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즉 그들이 보라는대로 예술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게 예술계에서 해석이 권위적인 한 집단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파시즘적 상황이 지속될 무렵, 존 버거가 나타나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는 사회에 대해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았던 것이다. 물론 역자가 다양한 독자층을 고려해 “다른 방식으로 보기”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보기” 혹은 “작품을 보는 여러 가지 관점” 등 조금 더 세심하게 제목을 번역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책을 다 읽고 당시의 상황까지 생각하게 되는 지금은 책의 한글 제목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제목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 책을 대중을 위한 예술 안내서 / 개론서라고 소개하는데, 나는 이 단어들로 이 책을 묘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예술 그 이상의 것을 다룬다.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화가 혹은 제작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표현으로만 생각하던 시절에 그는 어떻게 예술작품들이 당시의 사회와 밀접하게 닿아있는지, 또 그 사회를 형성한 주류의 욕망을 대변하는지에 대하여 비평한다. 열화당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르면 책은 크게 영상과 이미지 언어, 예술작품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유럽 전통 유화와 사유재산의 관계, 광고 이미지와 소비문화 [1] 에 대하여 다룬다. 그가 다루는 주제들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아직까지도 우리 모두가 이 주제들에 관하여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에 대하여 천천히 한 장씩 내 생각을 써보려 한다. 내가 때로는 책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하고 때로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마이너한 디테일에 집중할 수 있지만, 지혜 언니의 글처럼 그것 또한 “적극적인 오독”을 통해 나름대로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책 읽고 내가 생각나는 것들이랑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 문장처럼 Chapter 1 을 가장 잘 요약해줄 문장은 없을 거다. 저자는 이 장에서 이미지의 형성과정과 예술에 대한 이미지의 역사,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예술작품을 보아야할지에 대하여 논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 때 전체가 아닌, 나의 관심을 끌고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선택해서 본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는 A라는 사람의 외모 그리고 젊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끼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똑같은 A의 어투, 글, 생각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가진 꿈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낀다는거다. 그리고는 편향된 인지에 의해 전체를 어림짐작하고 추측하려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람이든 예술작품이든 부단히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것의 전체를 보는데 있어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거다.

이렇듯 이미지는 인류가 범하는 인지 편향의 결과물 중 하나다. 저자는 이미지가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며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또래 친구들에게 Nouveautekim 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해보자. 그 때 각각의 친구들은 Nouveautekim 에 대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미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중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겠지만 결국 각각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미묘하게 달라서 타인의 이미지만 가지고는 도대체 나 자신인 Nouveautekim 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각기 다른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상과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관찰 방식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인지 편향의 방식으로는 Nouveautekim 이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타자라도 이해하기가 힘들다는거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한계이기 때문에 나는 타자화를 인정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 대한 “반인권적 타자화 / 대상화”를 행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들은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이나 이해도 하지 않으려는 게으른 존재들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묘사방식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관찰 방식을 수용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까지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Nouveautekim의 거울은 그녀의 의 한 면만을 비출 것이고, 자신을 알고자 하는 그녀에게 더이상의 발전이란 없을 것이다. 획일적인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경제적 권위를 통해 사회적 다양성을 집어삼키는 순간, 파시즘의 탄생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미술사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저자가 TV 강연을 하던 때와 다르지 않다. 당시 주류 미술사학자들 및 미술비평가들은 양식사 중심의 형식주의적 미술사학에 대해서만 논할 뿐, 예술작품들의 탄생과 깊이 연관된 계급, 인종, 성차별, 경제 및 정치, 즉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한 논의는 전무했다.

그래서 다시 열화당의 설명을 빌리자면, 존 버거와 그의 BBC 연속 강의는 “영국의 제도화된 강단 미술사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난폭할 정도로 가차없이 깨부순다. 그는 “기존의 지배적인 미술사 담론에 대해 전복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급진적 비판의 시각을 보여 주었는데, 그는 이 전복을 통해 “기존의 표준적인 보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고, 또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이는 하나의 표준적인 방식(The Way of Seeing)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는, 여러 가지 방식(Ways of Seeing)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3]” 존 버거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는 1장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제시한다.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언어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경험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이때 경험이란 개인적 경험 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험,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경험 말이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예술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할지, 2장이 기다려진다.


오늘의 생각.

책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미술 작품에 기생하는 파시즘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원작의 시장가격에 달려있는 “가짜 종교성” 이며 두번째는 집에 걸려있는 복제품과 같이 걸려있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환상”이다. 현대의 복제 기술 및 카메라 기술이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 떼어내” 예술을 자유롭게 했건만, 그 권위는 다시 원작의 희소성과 그 원작이 보관되어있는 장소 —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 등 — 에 재배치되었다. 결국 예술은 자본주의를 통해 “과거의 비민주적 문화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복제되어 그 원래의 가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건으로서의 미술작품은 다시금 신비화되며,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술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인 숭배 및 신비화가 예술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던 권위의 몰락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중은 그들이 누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권위적 이미지에 대하여 “가짜 향수”를 느끼며 예술의 해방에 대하여 무관심했을까? 혹시 문화적 혜택을 받은 소수가 누리던 권력을 나도 누리고 있다는 쾌감, 권력욕, 성취감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누려보지 않은 가짜 향수를 통해 내면에 존재하는 권력을 향한 욕망을 은밀하게 드러내는건 아닐까. 역사적으로 예술 작품이 권력과 아주 밀접하게 얽혀있다는걸 알고 있고 또 믿고 있기 때문에, 설령 그런 의도가 없다 한들 무의식중에 예술 작품을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그렇게 보려고 하지는 않는가.

예술작품을 관람하는 나의 태도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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