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5단계에 관하여: 헤이즈, She’s Fine 앨범 리뷰

1969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는 그녀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 에서 사람들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의 다섯 단계 모델로 설명한다. (심슨가족에서는 부정-분노-공포-흥정-수용 의 단계로 묘사된다) 타인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는 등 큰 충격을 받으면 처음에 그 / 그녀는 그 현실을 부정한다. 주로 하는 말은 “그럴 리 없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난 괜찮아.”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괜찮을 리가 없을 것이며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두번째 분노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왜 나만!” 을 외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억울함과 함께 분노를 표출한다. 세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거라는걸 인식한 뒤 절망과 절박함이 뒤섞인 상태로 초자연적 존재 혹은 권위자와의 협상을 시도하고 매 순간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 한다면.” 네번째 단계는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는) 무력감에서 오는 우울이다. 매사에 초연해보이지만 사실 그 / 그녀는 극도로 우울한 상태이며,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종종 울게 된다. 마지막 수용의 단계에서 그 / 그녀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우울의 단계를 뛰어넘어 차분해지며, (이제는 지쳐서) 초연해진다. 그 / 그녀는 더이상 타인을 만나려 하지 않는 반면,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은 침묵이다. 침묵만이 그 혹은 그녀의 모든 감정을 대변한다. 가장 무서운건, 이 모든 과정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상 마치 순환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모든 단계를 다시 반복한다는 것이다.

싱어송라이터 & 래퍼 헤이즈는 앨범을 발매할 때 마다 자기복제 논란에 휩싸였었는데, 2016년 “돌아오지마” 그리고 2017년 “비도 오고 그래서” 가 히트를 친 이후로 매 앨범마다 똑같은 재즈풍의 이별노래를 낸다는 이유였다. 누군가는 헤이즈의 가창력이나 음악적 한계를 논하며 비판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녀가 이별마저도 돈벌이에 이용한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자기복제라는 세간의 비판 혹은 비난에서 조금만 더 세심하고 애정어린 마음을 가지고 앨범을 듣다보면, <돌아오지마> — </// (너 먹구름 비)> — <바람> — <She’s Fine> 앨범들이 사실은 각기 다른 단계의 “내면의 사망”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죽음을 이별로 바꾸었을 때, <돌아오지마>에서는 화자가 부정-분노의 단계, <///> 에서는 협상 단계, <바람>에서는 우울 단계, 그리고 <She’s Fine> 에서는 수용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것이 전체적인 앨범의 가사나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화자의 이별이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각기 다른 단계 혹은 앨범에서 수록곡을 통해 그 모든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연을 통해 구원받지 않는 이상, 화자는 연옥과도 같은 과정의 반복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였든 아니였든, 진짜라고 믿던, 혹은 진짜라 믿고 싶었던) 사랑 이후 비슷한 결의 이별과 슬픔을 겪은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1번 트랙, She’s Fine. <바람>에서 그녀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너 없이도 잘 살겠지만 너는 괜찮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널 위해서야” 라는 말만 남겼을 뿐.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잘 살길 바래” 라고 답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허공에 소리친다. “아… 괜찮다구요. 행복하다구요. 방해만 말아주시면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She’s fine.” 어쩌면 그녀가 그에게 잘 살길 바란다고 말했던 이유는, 그에게서 그 말을 듣고 싶었기에. “널 위해서야” 가 아닌 “잘 살아” 라는 말. 그래야만 이별은 쌍방과실이 되고 살을 태우는 것 같은 이 죄책감이 끝이 나기에.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에게서 그 말을 듣지 못했고, 그래서 매 순간 반복되는 형벌을 겪고 있다. 나는 잘 살고 있어요, 라는 그녀의 외침은 메아리로나마 돌아와 매 순간 이 벌을 겪는 그녀 스스로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

3번 트랙, 이유. 처음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겉모습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아직 그 사람의 세계에 한 발짝도 발을 내딛지 않은 상황에서, 그 사람의 무엇을 보고 좋아할 수 있을까. 답은 겉모습이다. 외모, 패션, 말투, 억양.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것들. 외모가 잘생기거나 예쁘고 아니고를 떠나서, 흔히 “내기부” 라고 말하지 않는가. 내 기준에 부합하는 겉모습을 통과해야만 그 사람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고 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내딛은 뒤 그 세계가 나의 세계와 물감처럼 섞여 하나가 (혹은 혼종이) 되는 순간, 나는 더이상 그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없게 된다. 아니,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든간에, 심지어 그의 외모와 패션이 바뀌어도 (처음에는 저 꼴이 뭐냐며 욕을 하지만) 그의 외모와 분위기가 곧 다시 나의 이상형이 된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마술상자 같아서, 이별 후에 그 심장을 상자에서 꺼내봐야만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5번 트랙, 숨고 싶어요. 트라우마로 인한 완벽한 대인기피의 상태를 그린 노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믿었던 (혹은 믿고만 싶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은 내 잘못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 속에 아주 오랫동안 깊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가진 자는, 괴물이 되어 완벽한 운명의 짝을 만나기 전까지는 타인의 심장에 자신과 같은 상처를 새기고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멀리 떠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여린 괴물들은 흉터가 시큰거릴 때마다 다른 사람을 괴물로 만들기 싫어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둬둔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7번 트랙,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미국에서는 이 상황을 trust issue 라고 하던데, 한국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 단어도 하도 주변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서 알게 됐다) 매듭과도 같던 관계, 사랑과 신뢰가 서로의 살을 부대끼는 그런 관계가 산산조각이 나면, 사람들은 마치 게슈탈트 붕괴라도 온 것 처럼 모든 논리체계와 통념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변곡점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래서 “파도가 세게 몰아치니까 바람이 불어오고”, “우산을 본 구름이 울어버리는” 것마냥 목격하고 인식하는 모든 일의 인과관계가 뒤집힌다. 이 모든 전복은 비극이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한 인간 본능이자 미로 속에서의 발버둥이며, 부정과 분노 그리고 우울로 인해 모든 것을 뒤집어 재로 만들어버린 내면에서 화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10번 트랙, E.T. 이별의 네 단계를 거친 화자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더 이상의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영원한 잠을 앞둔 화자는 이제서야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질 사람들이 느낄 슬픔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화자의 아픔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걸, 그녀의 몸부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는걸 알고는 “그러면 됐다”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띈다. 그리고는 침묵 (11번 트랙, 숨겨둔 편지)와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든다.

이만큼 솔직해지기 위해 화자는 그 모든 이별과 부정의 단계를 거쳐왔던걸까. 하지만 앨범 제목은 아직도 <She’s Fine> 이다. (I’m Fine 은 거꾸로 뒤집으면 Save Me 다) 이제는 화자가 모든 아픔을 내려놓길. 살을 에는 듯한 겨울의 형벌, 이별은 어차피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니까. 더 해주고 싶은 마음도, 그 없이 다다른 라라랜드도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삼키길. 더욱 더 성숙해질 다음 사랑과 행복할 나를 위해. 누군가를 나의 기억 속에서 정말로 놓아줄 때는 그대가 그를 이 세상의 모든 언어와 단어, 시와 구절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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